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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안 그렸으면 발명가가 됐을지도 몰라요.”
‘요철발명왕’ 만화가 윤승운


지하실을 개조한 비밀연구소를 아지트로 삼고 에디슨과 같은 위대한 발명가를 꿈꾸는 요철이.
요철이는 일상 속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각종 발명품을 만들어낸다. 숙제 대신해 주는 기계,
몰래 집 밖으로 탈출하는 상자, 하늘을 나는 기계 등, 이 만화 속에는 히죽히죽 웃음 나는 재미있는 발명품이 가득하다.
만화 ‘요철발명왕’을 통해 ‘발명은 재미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만화가 윤승운 작가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요철발명왕
# 윤승운
# 발명만화

그림체만 보아도 ‘아 이 만화!’ 하고 알 정도로 명랑만화의 대표 만화가인 윤승운 작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가 그린 명랑만화와 닮은 위트와 재치가 넘쳤다. 그가 거침없이 그려나가는 만화처럼 인터뷰 내내 들려준 그의 이야기도 주저함이 없었다.
놀기 좋아하던 소년,
독자만화에 투고하다
윤승운 작가가 만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됐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던 윤승운 작가는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놀러 다니는 데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신문에 독자만화를 투고하게 된다.

“그 당시 동아일보에 독자만화라고 있었어요. 1962년인가 고등학교 2학년 나이 때인데 학교도 안 가고 놀고 그럴 때였죠. 제가 그림을 좋아하니까 그 신문 독자만화에 투고를 자꾸 했거든요. 그랬더니 당시 독자만화를 심사하던 ‘고바우 영감’ 김성환 선생이 이렇게 쓴 거예요. ‘청파동에 사는 윤 아무개 외 10명은 더 분발하세요.’ 그림을 못 그렸으니까 그림도 없고 이름만 그렇게 실린 거예요(웃음). 집에서도 놀랐어요. 집안사람들이 신문에 이름날 일도 없는데 맨날 나가서 노는 애가 신문에 이름이 실렸다고요. 그런데 그게 재밌더라고요. 그 뒤로 몇 년 있다가 길창덕 선생에게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편지도 보내고, 잡지에도 자꾸 투고하다 보니 이렇게 만화를 그리게 됐죠.”

그렇게 만화가의 길에 들어선 윤승운 작가는 70~80년대 명랑만화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다양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독자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주는 대표 만화가로 사랑받고 있다.


발명가를 꿈꾸게 한
‘요철발명왕’
“발명을 하게 된 계기가 거창한 것은 없고, 공부하기 싫어서 요철이처럼 한다고 한 게 발명이었어요. 슈퍼맨보다 요철이를 더 좋아했고 ‘요철발명왕’을 바이블처럼 끼고 다녔죠.”

국내 최초 인공지능 법률정보서비스를 개발한 기업 인텔리콘의 임영익 대표의 말이다. 수많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발명가를 꿈꾸게 한 ‘요철발명왕’은 1975년부터 2년간 어린이잡지 <어깨동무>의 별책부록만화로 연재되면서 큰 사랑을 받았다. 윤승운 작가가 발명을 소재로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출판사의 연재 청탁 때문이었다.

“나는 원래 만화를 못 그려요. 간신히 장가는 가서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신문하고 잡지에 한 컷짜리 만화를 그리고 했는데, 어느 날 <어깨동무>에서 한번 들어와 보래요. 그래서 들어가 봤더니 64쪽이 되는 부록만화를 매달 그리라는 거예요. 내가 장편을 그려본 일이 없고 10쪽이 최고로 그려본 거라 못한다고 했죠. 그런데 막무가내로 40일의 여유를 준다고 해서 받아오기는 왔는데, 미루다 미루다 막판에 하룻밤인가 이틀 밤에 다 그렸어요. 처음에 주인공 이름이 한심이였는데 출판사에서 요철이로 재밌게 바꿔줘서 ‘요철발명왕’이 된 거죠. 발명이라고 뭐 크게 생각하고 한 게 아니라 소재를 생각하다 보니 그리게 된 거예요(웃음).”

요철이는
나의 ‘아바타’
요철이는 아버지 몰래 만든 비밀 발명연구소에서 ‘오늘은 뭘 만들까?’ 고민한다. 맨날 빵점을 맞을 정도로 공부에는 관심이 없지만, 발명을 하기 위해서라면 밤새 고민하고 노력하는 요철이. 윤승운 작가는 이런 요철이의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고 말한다.

“신기하게 내가 그렇게 노는 데도 집에서는 야단 한번 치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생각, 고민, 궁리, 이런 것을 많이 했거든요. 공부에 취미가 없고 배운 게 많지 않아도 내 나름대로 궁리라는 것을 많이 했어요.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을 만화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고 그런 부분이 발명하고도 많이 닮은 것 같아요. 내가 만화를 안 그렸으면 발명을 했을지도 몰라요.”

요철이는 매번 발명에 실패한다. 요철이가 발명에 성공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이어지지를 않았을 거라면서도 요철이의 도전에는 집념이 있다고 말하는 윤승운 작가. 실제로 만화 속 요철이는 발명 실패로 인해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고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사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만화를 60년 가까이 그렸어요. 사실 ‘한 우물을 팠다’라고 말하기보다는 다른 일을 할 생각을 안 했죠. 왜? 이게 재밌으니까. 누가 가르쳐줘서 한 것도 아니고 그때는 만화가가 돼서 밥 먹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는데, 우연히 이렇게 만화에 빠져서 지금까지 만화를 그려온 거죠. 집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머릿속에서 하던 궁리를 해내겠다는 집념. 요철이도 가만 보면 집념을 가지고 발명을 하고 있거든요.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누구한테든
배운다는 마음가짐
윤승운 작가의 이러한 고민과 집념은 요철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다양한 발명품을 만들어내게 한다. 쥐 잡는 기계, 고기 잡는 망태, 이태리타올로 밀지 않아도 저절로 때가 나오는 약품 등 실제로 제품화됐다면 불티나게 팔렸을 실용신안 특허급 발명품이다. 이렇듯 만화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 윤승운 작가는 발명을 위해서는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좋은 친구와 누구한테든 배우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만화에 그리기도 했지만, 지우개 달린 연필을 발명한 하이만 리프만도 옆에 있던 친구가 특허를 내자고 했기 때문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거든요. 연필에 지우개를 달고 이제 됐다 하면 끝날 수도 있었지만, 옆에서 특허를 내게끔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발명가로 이름을 남기는 거죠. 나도 한 컷짜리 만화를 그릴 때 ‘코망쇠 형제’ 오원석 작가가 나를 불러다 네 컷 만화 그리는 방법을 알려줬기에 나중에 단행본도 낼 수 있었죠. 논어에 ‘세 사람이 있으면 두 사람은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죠. 그렇듯이 누구한테도 내가 배운다는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인터뷰 후 그림을 그려주겠다며 먼저 펜과 종이를 꺼내는 그의 모습에서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만화가의 열정이 느껴졌다. 윤승운 작가의 고민과 집념은 요철이로 하여금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끊임없이 발명에 도전하게 했다. 앞으로도 요철이의 모습에서 영감과 자극을 받고 발명에 성공하는 수많은 발명가가 나올 것을 기대한다.

    ▲ 한국발명진흥회에 전하는 윤승운 작가의 사인. 윤승운 작가의 대표작 ‘맹꽁이 서당’의 한 장면과
    방정환 선생의 문구 ‘童心如仙(동심여선, 아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가 담겨있다.